임영신 박사묘 이장의 비극
임영신 박사묘 이장의 비극
  • 경인매일 kmaeil
  • 승인 2009.03.0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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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대 명예교수 ·계명고등학교장 이 달 순
임영신박사는 대한민국 건국과 교육발전의 공로자이다. 그분은 1919년 3.1만세시위때 천안 양대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시장으로 달려가 시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벌였고 전주로 내려가 그의 모교인 전주기전여고 학생들의 선두에서 전주시민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분은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박사를 도우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1932년 귀국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했다. 해방이 되자 이승만박사를 도와 UN으로 가 대한민국정부수립의 승인을 받아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 초대 상공부장관 제헌국회의원등 정계에서 활동했다. 한편 중앙여자대학을 1953년에는 남녀공학 종합대학으로 승격 총장으로 취임했으며 1965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장으로 10,11,12대 당선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이바지 했다. 그는 1977년 7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그리고 중앙대학 뒷동산에 안장되었다. 그분의 관 뚜껑과 바깥의 기념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했다. 이날 24일에 있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임영신 박사를 극찬했다. 공식연설에서 특히 대통령 취임사에서 대통령이 개인을 들먹이는 연설이란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대표로서 레이크 석세tm에 가서 많은 성적을 내고 나라를 세우는데 많은 일을 한 임영신 여사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이 다같이 모두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재정 후원도 못한 중에 중대한 책임을 그만큼 추진시킨것은 우리 대한민국 수립과 더불어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임영신박사의 건국공로탑에 담겨진 글이다. 임박사 서거후 조카인 임철순총장이 취임했다. 임총장은 중앙대학교를 양적으로 확대하는데 공훈을 세우게 된다. 서라벌예대를 인수 합병했다.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을 설립했다. 안성에 제2캠퍼스를 건립했다. 당시로서는 60만평의 거대한 음악대 예술대등의 첨단적인 경이적 시설로 교육계와 예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기숙사시설이 놀랍도록 자랑스러웠다. 중앙대학교는 양적으로 한창 눈부시게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임총장은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과욕의 탓이라는 평가다. 아마 재단을 키우겠다는 욕망이 강했다고 본다. 중소기업체를 다섯 개씩이나 인수 설립 했다. 그 기업들의 부채를 껴안은 체 어렵지 않게 인수한 것이다. 인수해 놓고 기업의 부채를 상환하지 않고 은행대출과 개인사채를 끌어들여 임명한 사장들에게 운명을 위임했다. 몇 년동안에 각 기업체의 부채는 늘어만 갔다. 임총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요청으로 민정당 정책의장을 맡아 정계에 투신하게 된다. 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중앙대학교는 제일교포 손으로 넘어갔다. 김희수 이사장은 일본의 부동산붐이 위기에 몰리면서 중앙대를 발전시킬 힘을 잃게 된다. 다시 중앙대는 두산그룹이 떠맡아 주인이 또 바뀌는 형평이 되었다. 임영신박사의 묘지에 학교건물을 건축하여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정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서 있는 임영신박사의 동상도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2월16일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화장하고 영신관으로 옮겨진 임영신박사의 동상 받침대에 납골당을 조성 안치하고 2월17일 임박사의 서거 22주년 기념일 32주기 추도식을 올리면서 “동상 이전 제막식”을 거행했다. 마음 내키지 않는 제막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 장례문화가 이장에서 수목장등 납골장례로 변화되기에 이해할 수도 있지만 훌륭한 묘를 이장 이전된 동상에 납골하는 비극속에서 그 명칭조차 은폐된 추도식의 비극이 우리를 슬프게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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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a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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